후한 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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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영제는 168년부터 189년까지 후한의 황제였다. 그는 세습 제후 가문 출신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영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황건적의 난과 같은 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의 치세는 후한 쇠퇴의 중요한 원인으로 평가받으며, 암군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제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는 188년 황제 직속의 상비군 창설을 구상하고 서원 팔교위를 설치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영제는 두 아들, 유변과 유협을 두었으며, 그의 사후 후계 문제로 인해 후한 왕조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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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소제는 후한 영제의 아들로 189년에 황위에 올랐지만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독살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 후한말 황족 - 복황후
후한 헌제의 황후인 복황후는 조조의 권력 장악에 불만을 품고 조조 제거 계획을 아버지에게 요청했다가 발각되어 폐위 후 살해당했다.
후한 영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영제 (漢靈帝) |
휘 | 유굉 (劉宏) |
신상 정보 | |
출생 | 156년 |
사망 | 189년 5월 13일 (33세) |
부친 | 유장 |
모친 | 효인황후 동씨 |
재위 정보 | |
왕조 | 후한 |
즉위 | 168년 2월 17일 |
퇴위 | 189년 5월 13일 |
이전 | 환제 |
이후 | 소제 |
연호 | 건녕 (168년 ~ 172년) 희평 (172년 ~ 178년) 광화 (178년 ~ 184년) 중평 (184년 ~ 189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송황후 하황후 영회황후 |
자녀 | 유변 유협 만년공주 |
기타 | |
시호 | 효령황제 (孝靈皇帝) |
능묘 | 문릉 (文陵) |
후작 | 해독정후 (解瀆亭侯) |
해독정후 재위 기간 | ? – 168년 2월 |
계승자 | 유숙 |
2. 생애
168년, 슬하에 자식이 없던 당숙 환제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1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환제 때부터 환관들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제 즉위 바로 다음 해부터 두무와 진번 등이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었고, 환관들은 역습하여 환제 시대의 외척들과 진번, 이응 같은 사대부들을 몰아냈다. 이후 조절, 후람, 왕보 같은 환관들이 권력을 잡았다.[16]
그 후로도 청류파(清流派)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환관들과 그에 내응하는 사람들을 탁류(濁流)라고 부르며 저항했지만, 당고의 옥으로 진압되었다.[16]
172년, 후람이 죄를 짓고 고발당해 자살한 뒤, 왕보가 발해왕 유리를 반역자로 몰아 자살하게 하는 등 권세를 떨쳤으나, 179년 양구에게 탄핵당해 죽었다. 조절은 반격하여 양구와 진구를 모략해 죽이고, 181년에 천수를 누렸다.[16]
이 기간 동안 강족과 선비족 같은 이민족들의 침입과 천재지변, 각 지방의 반란이 잦았다. 장환, 단경, 황보규 등이 반란 진압에 분주했지만, 영제는 궁궐 내에서 상인 흉내를 내거나 술과 여자에 빠져 조정에 관심을 두지 않아, 장양, 조충 등 십상시라 불리는 환관들이 정치 실권을 장악했다.[16]
영제는 학문을 중시하여 175년 유학 경전을 바로잡기 위해 희평석경을 만들었고, 177년 서화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모아 홍도문학을 열었다. 채옹은 홍도문학을 비판하며 간언했으나 영제는 듣지 않았다.[16]
184년, 대현량사 장각이 황건의 난을 일으켜 후한 왕조가 위기에 몰렸지만, 동탁, 황보숭, 주준 등 지방 호족들의 협력과 장각의 급사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란으로 후한 정규군의 무력함이 드러나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장연, 장순, 한수 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공손찬, 손견 등이 진압하여 공을 세웠다.[16]
이후에도 매관매직과 뇌물이 만연한 정치를 지속했고, 매관으로 관직을 얻은 자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력은 피폐해지고 치안이 악화되어 후한의 국력은 더욱 쇠퇴했다.[16] 매관으로 관직을 얻은 인물로는 최열, 번릉, 조숭이 있다. 영제는 송씨를 폐하고 하씨를 황후로 세웠으며, 하씨의 오빠 하진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하진은 환관에게 불만을 품은 원소의 지지를 받아 십상시와 대립했고, 하황후와 영제의 어머니 동태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16]
188년, 서원팔교위 제도를 설치하여 신임하는 내시 건석에게 하진, 원소, 조조를 통솔하게 했다. 유언의 제안으로 자사 제도를 부활시켰다.[16]
189년, 국내 혼란 속에 34세로 붕어했다.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아 붕어 후 유변과 유협 사이에 황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16] 영제 시대는 십상시 등 환관 중용, 무거운 부역 부담으로 민심이 이반되었고, 황건의 난으로 황제 권력이 쇠퇴하고 지방 호족의 힘이 강대해져 삼국 시대의 전 단계가 만들어졌다.[16]
2. 1. 가계 배경과 즉위
환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환제의 황후 두 황후는 황태후가 되어 황족의 계보를 검토하여 다음 황제가 될 후보를 선택했고, 168년 12세의 해독정후 유굉을 황제로 지목했다. 유굉은 장제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해독정후 유장, 어머니는 동 부인이었다.[4][5] 즉위 후, 영제는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할머니에게 각각 황제와 황후라는 시호를 수여하여 그들을 존경했다. 그의 어머니인 동 부인은 황태후가 되지 않고 대신 귀인 칭호를 받았다.2. 2. 초기 통치 (168년 ~ 178년)
168년, 환제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1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환제 때부터 환관들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제 즉위 바로 다음 해부터 두무와 진번 등이 환관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16] 그러나 그 계획은 누설되었고, 환관들은 역습하여 환제 시대의 외척들과 거기에 합류했던 진번과 이응 같은 사대부들을 몰아냈다. 조절, 후람, 왕보 같은 환관들이 권력을 잡았다.[16]그 후로도 청류파(清流派)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환관들과 거기에 내응하는 사람들을 탁류(濁流)라고 부르며 저항했지만, 당고의 옥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의해 진압되었다.[16]
172년, 후람이 죄를 짓고 고발을 받아 자살한 뒤, 왕보가 발해왕(渤海王)인 유리를 반역자로 모함하여 자살하게 했다.[16]
178년, 영제의 아내 송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환관들의 간계에 희생되었다. 환관들은 송황후가 주술을 사용하여 영제를 저주했다고 모함했고, 황제는 그들을 믿고 황후를 폐위시켰다. 황후는 투옥되어 절망 속에 죽었고, 그녀의 아버지 송풍과 나머지 가족은 몰살당했다.[16]
2. 3. 중기 통치 (178년 ~ 184년)
178년, 영제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한나라의 찰거(한무제가 도입한 문관 임용 제도)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광범위한 부패를 초래했다.[16] 이른바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돈으로 산 사람들은 부임 후에도 부패를 지속했다. 영제는 관직에 오를 때 초기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면 분할 납부를 허용하는 등 매관매직을 적극 장려했다.[16]181년 1월, 영제는 하씨 부인을 새로운 황후로 옹립하고, 그녀의 오빠인 하진을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16] 하씨 부인은 황제를 위해 여성을 선발하는 내시에게 뇌물을 바쳐 황실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6] 그녀는 아들 유변을 낳았기 때문에 황후가 되었다.[16] 영제에게는 유변 이전에 요절한 다른 아들들이 있었다.[16]
이 시기에 영제는 황실 정원을 짓는 데 몰두하여, 제국 전역의 군과 국가 관료들에게 직접 조공을 바치도록 명령해 건설 자금을 충당했다.[16] 이는 관료들이 더 많은 조공을 징수하기 위해 부패에 의존하게 만들었다.[16] 영제는 가끔 신하들의 조언을 경청하기도 했지만, 일관성이 없었다.[16] 신하들은 영제가 원할 때만 자신의 말을 듣는다고 여겨 정책 문제에 대해 설득하는 데 좌절감을 느꼈다.[16]
2. 4. 황건적의 난 (184년)
184년, 대현량사(大賢良師) 장각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16] 황건적의 난은 후한 왕조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동탁, 황보숭, 주준 등 지방 호족들의 활약과 장각의 급사로 진압에 성공하였다.[16] 그러나 이 반란으로 인해 후한 정규군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6]장연, 장순, 한수 등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공손찬, 손견 등이 이들을 진압하며 공을 세웠다.
183년 이전에, 기주에서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太平教중국어)가 도교 반란 운동을 시작했다. 장각은 병을 치료하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183년까지 그의 가르침과 추종자들은 기주, 청주, 서주, 유주, 형주, 양주, 연주, 예주 등 8개 주로 퍼져나갔다. 몇몇 주요 황실 관리들은 장각의 영향력에 우려하여 태평도를 해산할 것을 제안했으나, 후한 영제는 듣지 않았다.
장각은 반란을 계획하며 36명의 군사 지휘관을 임명하고, 그림자 정부를 구성했으며, "푸른 하늘은 멸망했으니, 보라, 누런 하늘이 곧 떠오를 것이다. 갑자년에 천하에 번영이 있으리라!"라는 선언문을 썼다. (중국 육십갑자 달력에 따르면, 184년은 갑자년이다.) 장각은 지지자들에게 흰 활석으로 '갑자'라는 글자를 낙양 등 도시의 관공서 문에 크게 쓰게 했다. 장각의 추종자 마원의()는 환관과 공모하여 궁궐 내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184년 초, 이 음모가 발각되어 마원의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후한 영제는 태평도 신도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장각은 즉시 반란을 선포했다. 반란군은 노란색 두건이나 머리 스카프를 착용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상징이 되어 황건적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 달 안에 장각은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당고의 옥에 동정적이었던 환관 여강()의 제안에 따라, 후한 영제는 황건적에 합류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당고파를 사면했다. (여강은 다른 환관들의 보복으로 황제 폐위 혐의를 받아 자결했다.)
후한 영제는 황건적에 맞서 황보숭, 조조, 부섭(傅燮중국어), 주준, 노식, 동탁 등을 파견했다. 황건적은 주로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익숙한 량주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병력과 싸웠다. 184년 말, 장각이 사망했고, 나머지 황건적들은 이듬해에 점차 흩어졌다(몇몇 소규모 반란은 205년까지 진압되지 않았다). 량주 군대는 다른 주의 군대를 얕보기 시작했다. 황건적의 난 동안과 그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군사 집단을 조직했고, 상당수가 정부군에 저항했으며, 황건적이 패배한 후에도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2. 5. 후기 통치 (184년 ~ 189년)
184년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영제는 사치와 부패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관직을 판매했으며, 그 결과 농민 반란과 군사 반란이 더욱 증가했다.[6] 185년, 황궁 남쪽에 화재가 발생하자, 십상시는 영제에게 궁궐 재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무의 토지에서 10마를 세금으로 징수할 것을 제안했다. 영제는 곧 태원군(太原), 하동군(河東), 적도군(狄道)의 군 관리들에게 목재와 무늬가 있는 돌을 낙양으로 운송하여 건축 자재로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물품이 궁에 도착했을 때, 환관들은 노동자들에게 품질이 좋지 않은 자재를 납품했다고 꾸짖고, 시장 가격의 10분의 1 수준으로 헐값에 지불을 강요했다. 그들은 자재를 다른 환관에게 되팔았지만, 구매를 거부당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인 목재는 썩기 시작했고, 건설 작업은 수년간 지연되었다. 영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일부 지방 관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에게 더 많은 건축 자재를 생산하도록 강요하여 백성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6]영제는 낙양으로 물품을 전달할 때마다 기병 장교를 사자로 임명했다. 이들은 중사(中使; "중앙 사절")라고 불렸으며,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을 강요하며 권력을 남용했다. 자사(刺史) 이하 관리 임명은 군대 및 궁궐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해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 따라 결정되었다. 관직을 맡기 전, 관리들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아야 했다. 필요한 금액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자살했고, 임명을 거부한 사람은 강제로 관직을 맡아야 했다.[7]
거록군(鉅鹿郡) 태수(太守)로 새로 임명된 사마직(司馬直)은 정직한 관리로 명성이 높아 300만 마라는 적은 금액을 지불하면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부모와 같은 내가 그들을 착취하여 (황제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니, 이런 짓을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병을 핑계로 사임을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낙양 근처 맹진(孟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상소문을 써서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역사적 사례를 들어 황제에게 경고한 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영제는 사마직의 상소를 읽고 궁궐 재건 자금 모금을 일시 중단했지만,[8] 곧 건설 사업을 재개했다. 그는 서쪽 정원에 전각을 짓고 농업부에서 가져온 보물과 비단으로 채웠다. 하간군의 출생지를 방문하여 땅을 얻고 저택과 탑을 짓는 데 사용했다. 영제는 변방 후작 출신으로 가난했기에, 특히 환제가 많은 재산을 남기지 않은 것을 보고 개인 재산을 축적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황실 재산뿐 아니라 낮은 직급 환관들에게서도 부를 끌어모았다.[9]
영제는 "상시 장각은 나의 아버지이고, 상시 조충은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했다.[10] 환관들은 영제의 신뢰와 총애를 받아 무법적으로 행동하고 권력을 남용했다. 심지어 황궁과 같은 디자인으로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 영제가 영안후대(永安侯臺)라는 높은 전망대에 방문했을 때, 환관들은 그가 저택을 보고 의심할까 봐 "폐하, 높은 곳에 올라가시면 백성들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그들을 믿고 높은 탑과 전망대 방문을 중단했다.[11]
186년, 영제는 환관 송전(宋典)과 필람(畢嵐)에게 새 궁궐, 청동상 4개, 거대한 청동 종 4개, 물 뿜는 동물 조각상 등 새 건설 프로젝트를 감독하게 했다. 동전을 주조하고 유통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이들은 이를 황제의 사치 과시로 인식했고, 동전이 결국 흩어질 것이라는 징후로 보았다. 이는 영제 사후 낙양에서 혼란이 발생했을 때 사실로 드러났다.[12] 영제는 조충을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했지만, 약 100일 만에 해임했다.[13]
188년,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 제도를 설치하여 신임하는 내시 건석에게 하진, 원소, 조조를 통솔하게 했다. 유언의 제안으로 자사(刺史) 제도를 부활시켰다.
189년, 영제가 위독해지자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영제에게는 유변 (하황후 소생)과 유협 (왕미인 소생) 두 아들이 있었다. 영제는 어린 시절 아들을 자주 잃어 아들은 궁 밖에서 양육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변은 도사 사자묘(史子眇)에게, 유협은 동태후에게 맡겨져 각각 "사후", "동후"로 불렸다. 유변은 황후 소생에 나이도 많았지만, 영제는 행동이 점잖지 않다고 여겨 유협을 태자로 삼고 싶어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영제가 사망하자, 신뢰하던 환관 건석은 하황후의 오빠 하진을 죽이고 유협을 황제로 세우려 하진과의 만남에 함정을 팠다. 하진은 이를 알아채고 유변을 황제로 선포했다.
3. 평가
환제와 함께 암군(暗君)으로 평가받는 영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영제의 정책이 황제권 강화를 위한 시도였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16]
3. 1. 부정적 평가
환제와 함께 암군(暗君)으로 평가받는 영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황건적의 난 등 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후한 쇠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6] 다만, 만년에 영제에 의해 등용된 개훈과 같이 간신들에게 현혹된 것뿐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16]3. 2. 긍정적 재평가 (최근 연구)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영제 시대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이시이 히토시 등은 영제 시대의 정책들이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16]- 매관매직: 영제가 시행한 매관매직은 단순한 사치와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황실 재정을 확보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광무제 이후 축소되었던 황실 재정을 회복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후한 왕조 체제와 대립하는 면이 있어, 결국 악정으로 평가받게 되었다.[16]
- 서원팔교위 설치: 188년 영제가 설치한 서원팔교위는 황제 직속 상비군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후한은 지방에서 징집된 농민병 중심의 군대로, 질이 낮았다. 영제는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질 높은 근위군을 편성하여 상주시키려 했고, 이를 위해 서원팔교위를 설치했다. 이 군대 편성은 훗날 조조가 계승하여 위나라 국군 편성의 근간이 되었다.[16]
- 주목 제도 부활: 188년 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활시킨 주목 제도는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4. 가족 관계
분류:후한의 황족
5. 기타
영제는 손견과 동갑이며, 장남 유변은 마초와, 차남 유협은 제갈량과 생몰년이 같다.[16] 삼국지연의에서는 영제가 즉위했을 때 궁궐 안에 구렁이가 나타나고 암탉이 수탉이 되는 등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었다는 묘사가 있다.
6. 연표
영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西曆) | 168년 | 169년 | 170년 | 171년 | 172년 | 173년 | 174년 | 175년 | 176년 | 177년 |
간지 (干支) | 무신 | 기유 | 경술 | 신해 | 임자 | 계축 | 갑인 | 을묘 | 병진 | 정사 |
연호 (年號) | 영강 2년 건녕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희평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영제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20년 |
서력 (西曆) | 178년 | 179년 | 180년 | 181년 | 182년 | 183년 | 184년 | 185년 | 186년 | 187년 |
간지 (干支) | 무오 | 기미 | 경신 | 신유 | 임술 | 계해 | 갑자 | 을축 | 병인 | 정묘 |
연호 (年號) | 7년 광화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중평(中平) 원년 | 2년 | 3년 | 4년 |
영제 | 21년 | 22년 | ||||||||
서력 (西曆) | 188년 | 189년 | ||||||||
간지 (干支) | 무진 | 기사 | ||||||||
연호 (年號) | 5년 | 6년 |
참조
[1]
서적
Liu Hong'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3]
간행물
Emperor Huan and Emperor Ling: being the Chronicle of the Later Han dynasty for the years for the years 157 to 189 AD as recorded in Chapters 54 to 59 of the Zizhi Tongjian of Sima Guang
https://digitalcoll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4]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5]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6]
서적
Houhanshu
[7]
서적
Houhanshu
[8]
서적
Houhanshu
[9]
서적
Houhanshu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Houhanshu
[12]
서적
Houhanshu
[13]
서적
Houhanshu
[14]
서적
後漢書
[15]
논문
中国古代貨幣経済の持続と展開
汲古書院
2018
[16]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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